게티즈버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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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게티즈버그 전투는 1863년 7월 1일부터 3일까지 펜실베이니아주 게티즈버그에서 벌어진 남북 전쟁의 중요한 전투이다. 로버트 E. 리 장군이 이끄는 남부 연합 북버지니아군과 조지 G. 미드 장군이 지휘하는 북군 포토맥군 사이에 벌어진 이 전투는 남부 연합의 북부 침공을 저지하고 북군의 승리를 이끌었다. 전투는 3일간 격렬하게 진행되었으며, 양측 모두 막대한 사상자를 냈다. 게티즈버그 전투는 남북 전쟁의 전환점으로 평가받으며, 남부 연합의 쇠퇴를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투 이후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게티즈버그 연설을 통해 전사자들을 기리고 전쟁의 의미를 되새겼다. 현재 게티즈버그 국립 군사 공원은 미국 국립공원 중 하나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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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즈버그 전투 | |
---|---|
위치 정보 | |
기본 정보 | |
전투 이름 | 게티즈버그 전투 |
일부 | 미국 남북 전쟁의 동부 전역 |
날짜 | 1863년 7월 1일 ~ 7월 3일 |
장소 |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게티즈버그 |
결과 | 북군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미국 |
교전국 2 | 남부 연합 |
지휘관 | |
지휘관 1 | 조지 미드 |
지휘관 2 | 로버트 E. 리 |
병력 규모 | |
병력 1 | 93,500–104,256명, 360문 포병, 36개 기병 연대 |
병력 2 | 65,000–80,000명, 270문 포병, 9,500명 기병 |
사상자 | |
사상자 1 | 23,049명 |
사상자 2 | 23,000–28,000명 |
부대 정보 | |
부대 1 | 포토맥 군 |
부대 2 | 북버지니아 군 |
이미지 및 음성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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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전투 배경
챈슬러즈빌 전투에서 북군에게 승리한 리는 북부 침공을 결심했다. 이는 북군의 여름 전쟁 계획을 방해하고, 빅스버그에서 포위된 남군 수비대를 구원하며, 버지니아 대신 북부 농장에서 물자를 확보하기 위함이었다.[21]
리는 이 작전으로 북군에 타격을 주어 링컨이 평화 조약을 체결하고, 유럽 국가들의 승인을 얻어 북부가 평화 조약에 응하도록 유도하려 했다. 남부의 전쟁 자원이 부족했기 때문에 전쟁을 빨리 끝내야 유리하다고 판단했다.[21]
1863년 6월 3일, 리의 군대는 버지니아주 프레더릭스버그에서 북쪽으로 이동, 2개 군단을 3개 군단으로 재편했다. 제임스 롱스트리트는 1군단장, 토마스 "스톤월" 잭슨의 군단은 둘로 나뉘어 리처드 유얼 소장이 하나를, A. P. 힐 중장이 3군단을 맡았다.
조지프 후커가 지휘하는 북군 포토맥군은 약 9만 명 이상이었으나, 링컨 대통령은 챈슬러즈빌 전투 패배와 소극적인 태도에 실망하여 조지 미드로 교체했다.
6월 9일, 브랜디 기차역에서 벌어진 기병대 간의 전투는 게티즈버그 전역의 첫 교전이었다. 북군 기병대는 남군과 대등한 실력을 보였으나, 젭 스튜어트는 복수를 위해 북군 후방으로 깊숙이 침투하여 정찰 및 엄호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리는 전투 직전까지 북군의 움직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6월 중순, 리의 북버지니아군은 포토맥강을 건너 메릴랜드로 진격했다. 6월 29일, 남군은 챔버스버그에서 서스퀘하나 강과 해리스버그, 라이츠빌 근처까지 진출했다.
하퍼스페리 수비대 병력 문제로 링컨과 갈등을 빚은 후커의 사표를 링컨은 즉시 수리하고, 6월 27일~6월 28일 사이에 조지 고든 미드를 새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6월 29일, 리는 포토맥군이 포토맥강을 건넜다는 소식을 듣고 캐시타운으로 전 부대에 집결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게티즈버그는 양측 모두 원했던 전장이 아니었다. 양군이 게티즈버그에서 충돌하게 된 것은 북군 기병사단장 존 뷰퍼드 때문이었다.
6월 30일, 존스턴 페티그루가 지휘하는 노스캐롤라이나 여단이 게티즈버그로 접근, 북군 기병대를 발견하고 캐쉬타운으로 복귀했다. 헨리 히스는 북군 규모를 과소평가했고, 리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다음 날 정찰 병력을 보내기로 했다. 7월 1일 오전 5시경, 히스 사단이 게티즈버그로 진격을 시작했다.
2. 1. 남군 및 북군 상황
챈슬러즈빌 전투에서 남군이 승리하자 기세를 탄 로버트 E. 리 장군은 북부로 진격을 계획했다. 볼티모어와 필라델피아를 함락시켜 북부의 전쟁 지속 의지를 꺾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같은 시기에 북군은 조셉 후커에서 조지 미드로 사령관을 교체했다. 챈슬러즈빌 전투에서 패배한 후커는 에이브러햄 링컨에 의해 경질되었다. 미드가 선택된 이유 중 하나는 그가 미국 태생이 아니라는 점, 즉 미국 시민이라도 해외 출생자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수 없다는 정치적 이유 때문이었다고 알려져 있다.[7]
2. 2. 지리적 배경
게티즈버그는 철도와 주요 도로가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로, 보급 및 병력 증강에 중요한 지점이었다. 남군과 북군 모두 게티즈버그의 중요성을 인지했으나, 대규모 충돌을 우려하여 적극적인 진군은 피했다.2. 3. 군사적 상황
챈슬러즈빌 전투(1863년 5월 1일 ~ 5월 3일)에서 북군의 포토맥군에게 승리한 직후, 리 장군은 북부로 진격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리의 두 번째 북부 침공이었다. 이 작전으로 리는 북군의 여름 전쟁 계획을 방해하고, 빅스버그에서 포위된 남군 수비대를 구원하고자 했다. 또한 전쟁으로 황폐해진 버지니아 대신 북부 농장에서 필요한 물자를 확보하려는 목적도 있었다.[21]리의 7만 5천 병력은 펜실베이니아의 필라델피아, 메릴랜드의 볼티모어, 그리고 워싱턴 D.C.를 위협할 수 있었고, 북부에서 확산되던 평화 운동에 힘을 실어줄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21]
3. 전투 전개
7월 1일 저녁부터 7월 2일 아침까지 양측 군대의 나머지 보병 대부분이 도착했다. 북군은 제2, 3, 5, 6, 12군단이 도착했고, 남군의 제임스 롱스트리트의 두 사단 중 조지 피켓 준장의 사단은 챔버스버그에서 약 35.41km를, 에반더 M. 로 준장의 사단은 길포드에서 행군하여 아침 늦게 도착했다. 로는 11시간 만에 약 45.06km의 행군을 완료했다.[58]
북군 전열은 마을 남동쪽의 컬프스힐에서 시작하여 마을 남쪽의 묘지 언덕으로 북서쪽으로 이어졌고, 그다음 남쪽으로 묘지 능선을 따라 약 약 3.22km 이어져 리틀 라운드 탑 바로 북쪽에서 끝났다. 12군단 대부분은 컬프스 힐에 있었고, 제1군단과 제11군단의 잔여 병력은 묘지 언덕을 방어했으며, 제2군단은 묘지 능선의 북쪽 대부분을 담당했고, 제3군단은 그 측면에 위치를 잡도록 명령받았다. 북군 전열의 형태는 일반적으로 "낚싯바늘" 형태로 묘사된다.[59][60]
남군 전열은 서쪽의 신학교 능선에서 북군 전열과 약 약 1.61km 평행하게 이어졌고, 마을을 지나 동쪽으로 이어진 후 남동쪽으로 휘어져 컬프스 힐과 마주 보는 지점까지 이어졌다. 따라서 북군은 내선을 확보한 반면, 남군 전열은 거의 약 8.05km에 달했다.[61]
로버트 E. 리의 7월 2일 전투 계획은 조지 미드의 위치에 대한 총공격이었다. 우측에서 롱스트리트의 제1군단은 북동쪽을 향해 에미츠버그(Emmitsburg) 도로를 가로질러 북군 좌익을 공격할 위치를 잡고 북군 전열을 붕괴시키도록 되어 있었다. 공격 순서는 존 벨 후드와 라파예트 맥로스 사단이 먼저 시작하고, 그 뒤를 이어 A. P. 힐의 제3군단의 리처드 H. 앤더슨 사단이 공격하는 것이었다.[62]
좌측에서 리는 리처드 S. 이웰에게 롱스트리트의 공격에서 총성이 들리면 컬프스 힐과 묘지 언덕을 공격하여 미드가 병력을 이동시켜 좌익을 강화하는 것을 막도록 지시했다. 이웰은 수년 후 리가 명령을 동시 공격으로 변경했고, 단지 "소규모 공격"을 요구했으며, 유리한 기회가 주어지면 대규모 공격으로 전환될 것이라고 주장했다.[63][64]
그러나 리의 계획은 젭 스튜어트가 전장에 없는 상황에서 잘못된 정보에 근거했다. 리는 아침에 직접 좌익을 정찰했지만, 남군 우익의 롱스트리트 위치는 방문하지 않았다. 리는 롱스트리트가 미드의 좌익 너머로 이동하여 북군 측면을 공격하고 보급열차를 점령, 미드의 탈출 경로를 차단한다는 제안을 거부했다.[65]
리 장군은 오전 11시까지 공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62] 정오 무렵, 앤더슨 장군의 진격하는 부대가 다니엘 시클스 장군의 초소 경비대에 발견되었고, 롱스트리트의 제1군단이 형성될 제3군단은 오후 1시까지 위치를 잡지 못했다.[67] 긴 행군 후, 후드와 맥로스는 아직 위치를 잡지 못했고, 각각 오후 4시와 5시 직후에 공격을 시작했다.[68]
저녁 7시경, 컬프스힐을 목표로 한 남군 2군단 소속 에드워드 "앨러게니" 존슨 사단의 공격은 늦게 시작되었다. 조지 그린 준장이 지휘하는 뉴욕여단이 방어선을 구축하고, 1군단 및 11군단의 증원군 덕분에 남군의 공격을 막아냈지만, 남군은 컬프스힐의 낮은 지대에 대해 북군의 방어선 축성을 포기하게 할 수 있는 위치를 점령했다.[78]
어둠이 깔리면서, 주벌 얼리의 2개 여단은 동쪽 묘지 언덕의 북군 11군단을 공격했으나, 얼리는 지원에 실패했다. 로버트 E. 로즈 소장이 지휘하는 이월의 남은 사단도 서쪽의 세미트리 힐(Cemetery Hill)을 거슬러 이동하는 바람에 얼리의 공격을 지원하지 못했다. 북군은 내선 방어선을 활용, 2군단의 증원군과 함께 병력을 이동시켜 동쪽 묘지 언덕을 지켰고, 얼리의 여단들은 후퇴했다.[79]
젭 스튜어트와 그의 4개 기병여단은 오후 늦게 게티즈버그에 도착했지만, 2일째 전투에서 큰 역할은 없었다. 웨이드 햄프턴 여단이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의 미시간 기병대와 게티즈버그 북동쪽 헌터스타운에서 소규모 전투를 벌인 것이 전부였다.[80]
리 장군은 7월 3일, 전날과 같은 기본 계획으로 공격을 재개하려 했다. 제임스 롱스트리트는 북군 좌익을 공격하고, 리처드 S. 이웰은 컬프스힐을 공격하는 것이었다.[81] 그러나 롱스트리트가 준비를 마치기도 전에, 북군 제12군단이 새벽부터 남군이 점령한 컬프스힐에 포격을 가했다. 남군은 컬프스힐을 공격했고, 7시간 동안의 전투 끝에 오전 11시경 전투가 중지되었다.[82]
리는 작전 계획을 변경해야 했다. 롱스트리트는 A. P. 힐 군단 소속 6개 여단과 자신의 제1군단 예하 조지 피켓의 버지니아 사단을 지휘하여 묘지 능선의 북군 방어선 우측 중앙에 위치한 북군 제2군단을 공격하게 되었다. 이 공격의 핵심은 남군 포병대가 보병대 도착 전까지 적 방어선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다.[83]
오후 1시경, 170문의 남군 대포가 대규모 포격을 퍼부었다. 북군 포병대는 남군 보병 공격에 대비해 탄약을 아끼기 위해 처음에는 반격하지 않았다. 15분 후, 80문 이상의 북군 대포가 반격을 시작했다. 북버지니아군은 포탄이 부족하여 북군 거점에 충분한 포격을 할 수 없었다.[86] 오후 3시경,[87] 포격이 잠잠해졌고, 12,500명의 남군 병사들이 묘지 능선을 향해 1200미터를 전진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피켓의 돌격이다.[88][89][90]
7월 3일에는 두 번의 중요한 기병 전투가 있었다. J. E. B. 스튜어트는 남군 좌익을 보호하고, 묘지 언덕 공격에서 보병대가 북군 우익을 강타하여 북군 보급선과 통신선을 차단하는 데 성공하면 이를 이용할 준비를 했다. 게티즈버그 동쪽 5킬로미터 지점("East Cavalry Field")에서 스튜어트 부대는 데이비드 맥머트리 그레그 준장과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준장의 북군 기병대와 충돌했다.[101] 사브르를 이용한 백병전이 벌어졌고, 커스터는 제1미시간 연대를 이끌고 돌격하여 웨이드 햄프턴 3세 여단의 공격을 무력화시켜 스튜어트가 북군 지역에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게 했다. 피켓의 돌격 후, 미드는 저드슨 킬패트릭에게 빅 라운드 탑 남동쪽 롱스트리트 군단 보병 진지에 대한 공격을 명령했다. 엘런 파른스워스는 저항했으나 명령에 따라 전사했고, 그의 여단은 큰 피해를 입었다.[105]
3. 1. 전투 첫째 날 (7월 1일)


7월 1일 오전 5시 무렵, 남군 보병이 북군 기병을 사격한 것이 게티즈버그 전투의 시작으로 여겨진다. 처음에는 평소와 같은 작은 충돌이었지만, 점차 대규모 전투로 발전했다. 이때 충돌한 부대는 북군 기병 4개 대대에 맞서 남군 보병 2개 여단이었다. 부대 집결이 불완전했던 북군은 증원을 기다리는 동안, 병력 면에서도 우세한 남군 보병대의 전진을 저지하는 데 집중하여 성공했다.[35]
존 뷰퍼드 장군은 남군이 고지의 통제권을 장악할 경우 게티즈버그 남쪽의 고지대가 갖는 전술적 중요성을 바로 깨달았다. 게다가 게티즈버그는 사방으로 뚫린 도로 덕분에 교통의 요지이기도 했다. 뷰퍼드는 게티즈버그 서쪽 3개 능선(신사 능선(Herr Ridge), 맥퍼슨 능선(McPherson Ridge), 그리고 마을을 향해 서쪽에서 동쪽으로 뻗어있는 신학교 능선(Seminary Ridge, 루터신학교가 있다))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이곳들은 강력한 남군에 대항하여 자신의 적은 병력의 사단으로 충분히 작전 행동을 지연시킬 수 있는 능선이었다. 이것은 마을 남쪽의 강력한 방어거점인 묘지 언덕, 묘지 능선, 그리고 컬프스힐을 방어할 수 있는 보병부대의 도착을 기다리며 시간을 끌 수 있다는 의미였다.[39]
헨리 히스 사단은 제임스 아처 준장과 조지프 R. 데이비스 준장이 지휘하는 2개 여단이 전면에서 접근했다. 그들은 챔버스버그 파이크를 따라서 동쪽에서 전진했다. 7월 1일, 오전 7시 30분,[35] 마을 서쪽 5km 지점에서, 히스의 2개 여단은 윌리엄 갬블 대령의 기병 여단에서 파견된 중대급 병력과 마주쳤다. 이들은 울타리 뒤에서 기병용 카빈총으로 속사를 하면서 시간을 벌었다. 오전 10시 20분, 남군은 북군 기병대를 팩퍼슨 리지로 동쪽에서 압박했는데, 북군 1군단(존 F. 레이놀즈 소장 지휘)의 선두부대가 마침내 도착했다.[43]
파이크 북쪽에서 데이비스가 린샌더 커틀러 여단으로부터 약간의 성공을 거두긴 했지만, 능선에 미완성된 철도가 끊겨져 있는 지점에서 큰 손실을 입고 격퇴되었다. 파이크 남쪽, 아처 여단은 허버스트(맥퍼슨으로도 알려짐) 숲을 가로질러 공격했다. 솔로몬 메레디쓰 준장이 지휘하는 북군의 강철여단이 아처 여단을 상대로 아처 자신을 포함한 수백명의 포로를 획득하면서 주도권을 장악하였다.[44]
전투 초기, 레이놀즈 장군은 숲 동쪽에서 직접 병력 및 포병들을 지휘하던 중에 저격을 당해 말에서 떨어져 쓰러졌다.[45] 지휘권은 애브너 더블데이 소장이 인수하였다. 챔버스버그 파이크 지역 전투는 12시 30분 경까지 계속되었다. 전투는 오후 2시 30분 즈음에 다시 시작되어 히스 사단 전체가 투입되었고, 존 M. 브로큰브로 대령과 페티그루 여단도 가세하였다.[46]
페티그루의 사우스캐롤라이나 여단은 19 인디애나 연대를 측면에서 공격하여 철의 여단을 왔던 길로 되돌려 보냈다. 26 노스캐롤라이나 연대(약 900명으로 이루어진 가장 큰 연대였다)가 심각한 피해를 입어 대략 212구의 시체를 남겨놓고 철수했다. "강철 여단"은 묘지 능선을 향해 천천히 밀려났다. 힐은 윌리엄 펜더 사단을 공격에 투입시켰고, 북군 1군단은 루터신학교와 게티즈버그 거리를 통과하여 후퇴했다.[48]
서쪽 전투가 진행돼 감에 따라, 리 명령에 따라 케쉬타운을 향해 서쪽에서 행군하던 리처드 S. 이웰의 2군단 소속 2개 사단은 게티즈버그로 향하는 칼라일과 해리스버그 가도를 따라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 사이 북군 11군단 (올리버 하워드 소장 지휘)은 볼티모어 파크와 태니타운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달렸다. 오후, 북군의 방어선은 게티즈버그의 북서쪽, 서쪽, 북쪽으로 큰 반원형을 이루었다.[49]
북군은 충분한 병력이 없었다. 챔버스버그 파이크의 북쪽에 전개한 커틀러는 그의 우익이 텅 비어 있었다. 11군단 소속 극좌익의 사단은 방어선을 강화할 시간을 가질 수 없었고, 더블데이는 그의 예비여단을 방어선에 투입시켜야 했다.[50]
오후 2시경, 로버트 E. 로즈와 쥬벌 앤더슨 얼리의 2군단 소속 사단들이 마을 북쪽과 북서쪽에서 북군 1군단 및 11군단에 강력한 공격을 퍼부었다. 에드워드 A. 오닐과 알프레드 아이버슨의 여단들은 참나무 언덕 남쪽 존 C. 로빈슨 준장의 1군단 사단을 공격하여 심각한 손실을 입었다. 얼리 사단은 프랜시스 C. 바로우 준장이 자신의 11군단 소속 사단을 블로처 언덕(마을 북쪽에 있다. 이제는 바로우 언덕으로도 불린다)으로 전진시켰을 때 저지른 실수로 득을 보았다. 이 언덕은 군단 방어선 중에서 여러 방향에서 공격당하기 쉬운 돌출한 부분이었고, 얼리 사단은 북군 위치에서 우익을 형성한 바로우 사단을 공격하여 섬멸시킨 것이다. 바로우는 이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남군에 생포되었다.[52]
마을의 북쪽과 서쪽 양쪽에서 북군의 방어선이 붕괴되자, 하워드 장군은 마을 남쪽의 고지대인 묘지 언덕으로 후퇴를 명령했고, 그곳에서 그는 아돌프 폰 쉬타인웨어 사단을 예비대로 배치했다.[53]
윈필드 스콧 핸콕 소장이 전장의 지휘권을 인수했다. 제2군단 사령관이자 미드의 가장 신뢰하는 부하인 핸콕은 전장의 지휘권을 맡고 겟티즈버그가 주요 전투를 치르기에 적합한 장소인지 결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54] 핸콕은 하워드에게 "제가 본 전투를 치르기에 자연적으로 가장 강력한 위치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고, 하워드가 동의하자 핸콕은 논의를 끝맺었습니다. "좋습니다, 장군님, 저는 이곳을 전투 장소로 선택합니다." 핸콕의 결정은 후퇴하는 북군 병사들에게 사기를 북돋우는 효과를 가져왔다.[55]
리 장군은 북군이 고지대를 장악하고 있을 경우, 방어면에서 잠재력을 이해했다. 그는 이웰에게 "가능하다면" 묘지 언덕을 점령하라는 명령서를 보냈다. 이때 이웰은 공격을 선택하지 않았다.[56]
7월 1일 전투에 북군 18,000명에 대해 남군은 25,000명의 병력을 투입했고, 이는 전쟁 기간 중 23번째로 큰 전투였다.[57]
3. 2. 전투 둘째 날 (7월 2일)

저녁 7시경, 남군 2군단 존슨 사단의 컬프스 힐 공격은 늦게 시작되었다. 북군 12군단 대부분이 롱스트리트의 공격에 대비해 좌익으로 이동한 상황에서, 조지 그린 준장의 뉴욕여단만이 언덕에 남아 있었다. 그린은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했고, 1군단과 11군단의 증원군 덕분에 남군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러나 남군은 컬프스 힐 낮은 지대에 방어선 구축을 포기하게 할 수 있는 위치를 점령했다.[78]
어둠이 깔리면서 얼리의 2개 여단은 동쪽 묘지 언덕의 북군 11군단을 공격했다. 묘지 언덕은 앤드루 L. 해리스 준장의 1사단 2여단이 병력의 반을 잃으면서 약해진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얼리는 북군 방어병력을 공격하는 여단을 지원하지 못했고, 로버트 E. 로즈 소장의 이월 사단도 세미트리 힐을 거슬러 이동하면서 얼리의 공격을 지원하지 못했다. 북군은 내선 방어선을 활용, 2군단의 증원군과 함께 병력을 이동시켜 동쪽 묘지 언덕을 지켰다. 얼리의 여단들은 후퇴했다.[79]
젭 스튜어트와 그의 4개 기병여단은 오후 늦게 게티즈버그에 도착했지만, 2일째 전투에서 큰 역할은 없었다. 웨이드 햄프턴 여단이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의 미시간 기병대와 게티즈버그 북동쪽 헌터스타운에서 소규모 전투를 벌인 것이 전부였다.[80]
7월 1일 저녁과 7월 2일 아침 내내, 북군 2, 3, 5, 6, 12군단 등 양측 군대의 남은 보병 대부분이 전장에 도착했다. 롱스트리트의 두 사단 중 조지 피켓 준장의 사단은 챔버스버그에서 약 35.41km를, 에반더 M. 로 준장의 사단은 길포드에서 행군하여 아침 늦게 도착했다. 로는 11시간 만에 약 45.06km의 행군을 완료했다.[58]
북군 전열은 마을 남동쪽 컬프스 힐에서 시작, 북서쪽으로 묘지 언덕을 지나 남쪽으로 묘지 능선을 따라 약 약 3.22km 이어져 리틀 라운드 탑 바로 북쪽에서 끝났다. 12군단 대부분은 컬프스 힐, 1군단과 11군단 잔여 병력은 묘지 언덕, 2군단은 묘지 능선 북쪽 대부분, 3군단은 그 측면에 위치했다. 북군 전열은 "낚싯바늘" 형태였다.[59][60]
남군 전열은 서쪽 신학교 능선에서 북군 전열과 약 약 1.61km 평행하게 이어졌고, 마을을 지나 동쪽으로 이어져 남동쪽으로 휘어져 컬프스 힐과 마주 보는 지점까지 이어졌다. 북군은 내선을 확보한 반면, 남군 전열은 거의 약 8.05km에 달했다.[61]
리의 7월 2일 전투 계획은 미드의 위치에 대한 총공격이었다. 우측에서 롱스트리트의 1군단은 북동쪽을 향해 에미츠버그 도로를 가로질러 북군 좌익을 공격, 북군 전열을 붕괴시키도록 했다. 공격 순서는 존 벨 후드와 라파예트 맥로스 사단이 먼저 시작하고, 힐의 3군단 리처드 H. 앤더슨 사단이 이어 공격하는 것이었다.[62]
좌측에서 리는 이웰에게 롱스트리트의 공격에서 총성이 들리면 컬프스 힐과 묘지 언덕을 공격하여 미드가 병력을 이동시켜 좌익을 강화하는 것을 막도록 지시했다. 이웰은 수년 후 리가 명령을 동시 공격으로 변경했고, 단지 "소규모 공격"을 요구했으며, 유리한 기회가 주어지면 대규모 공격으로 전환될 것이라고 주장했다.[63][64]
리의 계획은 스튜어트가 전장에 없는 상황에서 잘못된 정보에 근거했다. 리는 아침에 직접 좌익을 정찰했지만, 남군 우익의 롱스트리트 위치는 방문하지 않았다. 리는 롱스트리트가 미드의 좌익 너머로 이동하여 북군 측면을 공격하고 보급열차를 점령, 미드의 탈출 경로를 차단한다는 제안을 거부했다.[65]
리 장군은 오전 11시까지 공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62] 정오 무렵, 앤더슨 장군의 진격하는 부대가 다니엘 시클스 장군의 초소 경비대에 발견되었고, 롱스트리트의 1군단이 형성될 3군단은 오후 1시까지 위치를 잡지 못했다.[67]
긴 행군 후, 후드와 맥로스는 아직 위치를 잡지 못했고, 각각 오후 4시와 5시 직후에 공격을 시작했다.[68]
다니엘 시클스 장군은 특별한 이유 없이 세미터리 릿지 이남의 방어군을 최전선으로 이동시키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여 리틀 라운드 톱 진지가 취약해졌고, 남군은 이 언덕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통신병이 남군의 움직임을 감지, 보고했고, 워렌 장군이 이 정보를 받고 남군의 움직임을 확인했다. 워렌은 리틀 라운드 톱 진지가 함락되면 북군의 패배가 결정적이 될 것이라고 예측, 가능한 모든 부대를 모아 진지로 이동시켰다. 남군의 공격은 격렬했으며, 진지 근처 숲과 초원에서 전개되었다. 리틀 라운드 톱 전투는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 알려져 있다. 4시간에 걸친 격렬한 전투에서 북군은 병력 면에서 열세였지만, 미드 장군은 남군이 돌파하려는 곳을 바꿀 때마다 그곳으로 병력을 이동시켜 적절하게 대응했다.
이 무렵 북쪽에서도 남군의 공격이 시작되었지만, 쉽게 패퇴했다.
3. 3. 전투 셋째 날 (7월 3일)
리 장군은 7월 3일 금요일, 전날과 같은 기본 계획으로 공격을 재개하려 했다. 롱스트리트는 북군 좌익을 공격하고, 이웰은 컬프스힐을 공격하는 것이었다.[81] 그러나 롱스트리트가 준비를 마치기도 전에, 북군 제12군단이 전날 잃은 진지를 되찾기 위해 새벽부터 남군이 점령한 컬프스힐에 포격을 가했다. 남군은 컬프스힐을 공격했고, 7시간 동안의 전투 끝에 오전 11시경 전투가 중지되었다.[82]리는 작전 계획을 변경해야 했다. 롱스트리트는 힐 군단 소속 6개 여단과 자신의 제1군단 예하 피켓의 버지니아 사단을 지휘하여 묘지 능선의 북군 방어선 우측 중앙에 위치한 북군 제2군단을 공격하게 되었다. 이 공격의 핵심은 남군 포병대가 보병대 도착 전까지 적 방어선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다.[83]
오후 1시경, 170문의 남군 대포가 대규모 포격을 퍼부었다. 북군 포병대는 남군 보병 공격에 대비해 탄약을 아끼기 위해 처음에는 반격하지 않았다. 15분 후, 80문 이상의 북군 대포가 반격을 시작했다. 북버지니아군은 포탄이 부족하여 북군 거점에 충분한 포격을 할 수 없었다.[86] 오후 3시경,[87] 포격이 잠잠해졌고, 12,500명의 남군 병사들이 묘지 능선을 향해 1200미터를 전진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피켓의 돌격이다.[88][89][90]
남군이 공격 지점으로 전진할 때 북군 제2군단의 소총 집중 사격과 묘지 언덕 및 리틀 라운드 탑에서의 격렬한 포격으로 공격대 절반이 공격 개시선으로 돌아오지 못했다.[91][92] 꼭짓점이라 불린 낮은 돌담에서 북군 방어선이 일시적으로 무너졌지만, 지원 부대가 틈을 메우며 남군의 공격을 격퇴했다.[94]
7월 3일에는 두 번의 중요한 기병 전투가 있었다. 스튜어트는 남군 좌익을 보호하고, 묘지 언덕 공격에서 보병대가 북군 우익을 강타하여 북군 보급선과 통신선을 차단하는 데 성공하면 이를 이용할 준비를 했다. 게티즈버그 동쪽 5킬로미터 지점("East Cavalry Field")에서 스튜어트 부대는 데이비드 맥그레그 준장과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준장의 북군 기병대와 충돌했다.[101] 사브르를 이용한 백병전이 벌어졌고, 커스터는 제1미시간 연대를 이끌고 돌격하여 웨이드 햄프턴 여단의 공격을 무력화시켜 스튜어트가 북군 지역에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게 했다. 피켓의 돌격 후, 미드는 저드슨 킬패트릭에게 빅 라운드 탑 남동쪽 롱스트리트 군단 보병 진지에 대한 공격을 명령했다. 엘런 파른스워스는 저항했으나 명령에 따라 전사했고, 그의 여단은 큰 피해를 입었다.[105]
4. 전투의 영향
7월 4일, 율리시스 그랜트의 북군이 빅스버그에서 승리하면서 게티즈버그 전투는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로버트 E. 리 장군은 조지 미드의 추격에 대비하여 방어 태세로 부대를 재배치했지만, 신중한 미드는 추격을 주저했고, 이는 훗날 많은 비판을 받게 되는 원인이 된다.
7월 5일, 비가 내리는 가운데 남부군은 게티즈버그를 떠나 버지니아로 후퇴했다. 미드의 포토맥군이 뒤를 추격했지만, 형식적인 추격이었고, 북버지니아군을 적극적으로 공격하려 하지 않았다. 포토맥 강이 범람하여 북버지니아군이 강을 건너지 못하고 정체되었지만, 북군이 따라잡았을 즈음에는 이미 남군은 강을 건너 버지니아로 철수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7월 14일, 제임스 존스턴 페티그루 장군이 치명상을 입는 등 많은 사상자를 낸 게티즈버그 전역은 막을 내렸다.
게티즈버그 전투의 결과에도 불구하고, 리 장군은 여전히 자신의 부하들이 무적이라고 믿는 듯했다. 챈슬러즈빌 전투에서의 승리와 게티즈버그 전투 첫날의 승리가 이러한 확신을 심어주었다. 그러나 북버지니아군의 많은 지휘관들은 경험이 부족했고, 이는 전투의 패배 요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예를 들어, 힐이나 이월은 유능한 사단 지휘관이었지만, 군단을 지휘해본 경험은 없었다. 또한, 리 장군의 느슨한 지휘 방식은 스톤월 잭슨에게는 효과적이었지만, 다른 군단 지휘관들에게는 그렇지 못했다. 게다가 남군은 7월 1일 이후, 각 부대 간의 유기적인 협동 공격에 실패했다. 결국, 리 장군은 자신의 고향에서 더 잘 싸우고 임무에 열성적인 조지 G. 미드 소장과 포토맥군이라는 새롭고 매우 위험한 적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전투가 끝난 후, 게티즈버그에는 두 군대를 합쳐 51,000여 명에 달하는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했다. 7천 명 이상의 병사들이 즉사했고, 뜨거운 여름 햇볕 아래 버려진 시체들은 빠르게 매장해야 했다. 5천여 마리의 말 시체는 마을 남쪽에서 소각되었고, 그 악취는 마을 주민들을 괴롭혔다. 전쟁의 피해는 11월 19일 국립 군인묘지가 헌정된 이후에도 4개월 이상 지속되었다.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게티즈버그 연설을 통해 전쟁의 의미를 되새기고, 게티즈버그에서 헛되이 죽어간 병사는 없다는 추모사를 남겼다.
오늘날 게티즈버그 국립 묘지와 게티즈버그 전장은 미국 국립공원 중 하나인 게티즈버그 군사공원으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으며,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 유적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4. 1. 사상자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양측 군대는 4만 6천 명에서 5만 1천 명 사이의 사상자를 냈다.[108] 북군 사상자는 23,055명(전사 3,155명, 부상 14,531명, 포로 또는 실종 5,369명)이었다.[9][109] 남군 사상자는 추산하기 더 어려운데, 많은 저자들이 28,000명으로 언급했지만,[110] 버시와 마틴의 2005년 저서 ''게티즈버그에서의 연대 병력 및 손실''에서는 23,231명(전사 4,708명, 부상 12,693명, 포로 또는 실종 5,830명)으로 기록하고 있다.[10] 이 전투로 리 장군의 장교 중 거의 3분의 1이 전사, 부상, 또는 포로가 되었다.[111]
게티즈버그 전투는 전쟁 중 가장 치명적인 전투였을 뿐만 아니라, 전사한 장군의 수도 가장 많았다. 남군은 폴 존스 세메스, 윌리엄 바크스데일, 윌리엄 도르시 펜더, 리처드 가넷, 루이스 아미스티드 장군과 전투 후 후퇴 중 J. 존스턴 페티그루 장군을 잃었다. 부상당한 남군 장군으로는 왼팔을 잃은 존 벨 후드 소장, 전투 첫날 머리에 총상을 입은 헨리 헤스 소장 등이 있다. 제임스 L. 켐퍼 장군과 아이작 R. 트림블 장군은 피켓의 돌격 중 심각한 부상을 입고 남군 후퇴 중 포로가 되었다. 남군 제1군단에서는 롱스트리트의 14개 사단 및 여단 지휘관 중 8명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했다.[113]
북군에서는 존 레이놀즈, 새뮤얼 K. 주크, 스티븐 H. 위드, 엘론 J. 펀스워스, 스트롱 빈센트 장군이 전사했다. 다니엘 시클스(다리 절단), 프랜시스 C. 바를로우, 다니엘 버터필드, 윈필드 스콧 핸콕 등도 부상당했다.[114]
다음은 버시와 마틴의 저서를 바탕으로 정리한 3일간 전투의 북군 및 남군 군단별 사상자 요약표이다.[115]
북군 군단 | 사상자 (전사/부상/실종) |
---|---|
제1군단 | 6,059 (666/3,231/2,162) |
제2군단 | 4,369 (797/3,194/378) |
제3군단 | 4,211 (593/3,029/589) |
제5군단 | 2,187 (365/1,611/211) |
제6군단 | 242 (27/185/30) |
제11군단 | 3,801 (369/1,922/1,510) |
제12군단 | 1,082 (204/812/66) |
기병군단 | 852 (91/354/407) |
포병 예비대 | 242 (43/187/12) |
남군 군단 | 사상자 (전사/부상/실종) |
---|---|
제1군단 | 7,665 (1,617/4,205/1,843) |
제2군단 | 6,686 (1,301/3,629/1,756) |
제3군단 | 8,495 (1,724/4,683/2,088) |
기병군단 | 380 (66/174/140) |
전투 중 기록된 유일한 민간인 사망자는 20세의 진니 웨이드였다. 그는 빵을 만들던 중 부엌을 관통한 총알에 맞아 사망했다.[117] 또 다른 주목할 만한 민간인 사상자는 1812년 전쟁 참전 용사인 69세의 존 L. 번스였다. 그는 전투 첫날 최전선으로 걸어가 자원하여 전투에 참여했고, 여러 부상을 입었으나 살아남아 1872년까지 살았다.[118]
전투 후, 거의 8,000구의 시체가 뜨거운 여름 햇볕 아래 놓여 있어 신속한 매장이 필요했다. 마을 남쪽에서는 3,000마리 이상의 말 시체[119]가 불태워졌고, 악취로 인해 마을 사람들이 병에 걸릴 정도였다.[120] 인구 2,400명에 불과한 게티즈버그 마을은 14,000명의 부상당한 북군 병사와 8,000명의 남군 포로를 돌봐야 했다.[121]
3일간의 전투로 인한 사상자는 양군 합쳐 약 5만 명에 달했다. 피해 규모는 비슷했지만, 인적 자원이 부족했던 남군에게 23,000명의 사상자는 큰 타격이었다. 반면 징병 가능 인구가 남군보다 많았던 북군은 비교적 빠르게 병력을 보충할 수 있었다. 이후 율리시스 그랜트 장군은 로버트 E. 리 장군과의 전투에서 이러한 인적 자원의 우위를 활용하여 최종 승리를 거두었다.
4. 2. 남북전쟁의 전환점
7월 4일, 율리시스 그랜트의 북군이 빅스버그에서 승리하였다.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남군은 북군의 침공을 저지하고 남부로 몰아냈지만, 뚜렷한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다. 반면 징병 가능 인구가 남군보다 많았던 북군은 비교적 빠르게 병력을 보충할 수 있었다.[189]빅스버그는 빅스버그 포위전 끝에 5월 18일에 함락되었다. 이로 인해 남부는 미시시피 강 서쪽의 텍사스주, 루이지애나주, 아칸소주와 연결되는 교통망을 거의 잃게 되었다.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많은 병력을 잃은 북버지니아군은 이후 대규모 공세를 펼칠 수 없었다.[189]
이 전투가 남북전쟁의 전환점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이 시점에 남부가 북부의 물량 공세에 밀려 붕괴될 것이라는 점은 많은 사람들에게 명확해 보였다. 리 장군 역시 이를 인지하고 있었으며, 계속해서 병력을 보충하여 침공해 오는 포토맥 군을 상대하는 것에 회의감을 느꼈을 것이다. 북버지니아군은 계속 승리했지만, 전투마다 많은 병사를 잃었고,[190] 인적 자원이 부족한 남부는 이를 보충하기 어려웠다.
4. 3. 남부 연합에 미친 영향
사실 남군은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모두 패배했다. 전투 마지막 시간 동안, 남부 연합국 부통령 알렉산더 스티븐스는 휴전 깃발 아래 버지니아주 노퍽에서 북군 전선에 접근했다. 남부 연합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의 공식 지시는 그의 권한을 포로 교환 및 기타 절차적 문제에 대한 협상으로 제한했지만, 역사가 제임스 M. 맥퍼슨은 그가 비공식적으로 평화 제의를 제시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고 추측한다.[140] 데이비스는 리의 승리한 군대가 북쪽에서 워싱턴으로 진군하는 동안 스티븐스가 남쪽에서 워싱턴에 도착하기를 바랐다. 링컨 대통령은 게티즈버그 전투 결과를 듣고 스티븐스의 전선 통과 요청을 거부했다. 게다가, 이 소식이 런던에 전해지자 남부 연합의 유럽 승인에 대한 미련이 남은 희망도 최종적으로 사라졌다. 당시 미국 영국 대사로 근무하던 아버지를 둔 헨리 애덤스는 "반군의 재앙은 성공에 대한 어떠한 희망으로도 구제받지 못했습니다. 이제 개입에 대한 모든 생각이 끝났다는 것이 인정되었습니다."라고 썼다.[140]패배의 영향을 더욱 악화시킨 것은 빅스버그 포위전의 종식이었다. 빅스버그는 게티즈버그 전투 다음 날인 7월 4일에 그랜트의 연방군에게 항복하여 남군은 3만 명의 병력과 모든 무기, 군수품을 잃었다.[141] 이 패배로 남부는 미시시피 강 서쪽 주들(텍사스주, 루이지애나주, 아칸소주)과의 교통을 거의 차단당했다. 이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남군 사령부는 패배했지만 아직 여력이 있는 리의 북버지니아군에서 롱스트리트(James Longstreet)의 군단을 빼내 서부 전선에 파병해야 했다.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많은 병력을 잃은 데다 1개 군단을 빼앗겨 병력이 더욱 감소한 북버지니아군은 그 이후로 대규모 공세를 펼칠 수 없는 상태에 빠졌다.[189]
4. 4. 북군의 승리 반응
연합군의 승전 소식은 북부를 흥분시켰다.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The Philadelphia Inquirer)''지는 헤드라인에 "승리! 워털루를 능가하다!"라고 선포했다. 뉴욕의 일기 작가 조지 템플턴 스트롱(George Templeton Strong)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137]하지만 리의 군대가 궤멸을 면하고 전쟁이 계속될 것이라는 것을 대중이 깨닫자 연합군의 열기는 곧 사그라들었다. 링컨은 해군장관 기디언 웰레스(Gideon Welles)에게 "우리 군대가 전쟁을 손아귀에 쥐고 있었지만, 그들은 전쟁을 끝내지 않았다!"고 불평했다.[138] 준장 알렉산더 S. 웹(Alexander S. Webb)은 7월 17일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살먼 P. 체이스(Salmon P. Chase), 윌리엄 H. 수어드(William H. Seward) 등"과 같은 워싱턴 정치인들이 미드에 대해 불만을 품고 "리 장군이 사실상 그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저에게 편지를 썼다"고 말했다.[139]
5. 게티즈버그 연설
1863년 11월 19일, 솔저스 내셔널 묘지 헌정식에서 링컨 대통령은 전사자들을 기리고 게티즈버그 연설을 통해 전쟁의 목적을 재정의했다. 게티즈버그에는 전쟁의 참상이 여전히 역력했다.
6. 역사적 평가
7월 4일, 양측 군대가 대치하고 있던 중 빅스버그가 율리시스 그랜트의 북군에 항복하였다. 같은 날, 로버트 E. 리는 조지 미드의 추격에 대비해 방어 태세로 부대를 재배치했지만, 신중한 미드는 추격하지 않아 훗날 비판을 받았다.[158] 7월 5일 비가 내리는 가운데 남군은 게티즈버그를 떠났고, 7월 14일 게티즈버그 전역은 종료되었다.
챈슬러즈빌 전투에서의 승리와 게티즈버그 초반의 승리는 리 장군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었지만, 경험 부족인 지휘관들과 리의 느슨한 지휘 방식은 패전의 요인이 되었다. 특히, 스톤월 잭슨과 달리 새로운 군단 지휘관들은 리의 스타일에 익숙하지 않았다. 또한, 남군은 7월 1일 이후 부대 간 유기적인 협동 공격에 실패했다.
전투 후, 게티즈버그에는 양측 합쳐 51,0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7천 명 이상이 즉사했고, 5천여 마리의 말 시체가 소각되었다. 11월 19일, 국립 군인묘지 헌정식에서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게티즈버그 연설을 통해 전사자들을 추모했다.
오늘날 게티즈버그 국립 묘지와 게티즈버그 전장은 미국 국립공원 중 하나인 게티즈버그 군사공원으로 지정되어 유지되고 있다.
6. 1. 결정적 승리 논쟁
게티즈버그 전투의 결과는 역사적으로 논쟁의 대상이었다. 당시에는 전쟁이 거의 2년이나 지속되었기 때문에 결정적인 사건으로 여겨지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종종 "전환점"으로 불리며, 주로 다음 날 있었던 빅스버그 함락과 함께 언급된다.[17] 이는 게티즈버그 이후 로버트 E. 리 장군의 남군이 더 이상 전략적 공세를 펼치지 못하고, 1864년과 1865년에는 율리시스 그랜트의 북군에 대응하는 데 그쳤다는 점과, 만약 남군이 게티즈버그에서 승리했다면 전쟁이 끝났을 수도 있다는 주장에 근거한다.[148]브루스 캐튼은 포토맥군이 승리했고, 이로 인해 남부 연합이 더 이상 전쟁에서 이길 수 없게 되었다고 평가했다.[149]
하지만 게티즈버그 전투가 북군의 결정적 승리였다는 견해는 널리 퍼져 있지만, 정확하지 않다는 의견도 있다. 7월 3일 리의 공세가 저지되고 펜실베이니아 작전이 조기에 종료된 것은 분명하지만, '결정적 승리'가 전쟁의 최종 결과를 결정하거나 큰 영향을 미치는 군사적 승리를 의미한다면 역사가들의 의견은 갈린다. 데이비드 J. 아이커는 게티즈버그를 "남부 연합의 전략적 손실"이라고 평가했고, 제임스 M. 맥퍼슨은 리와 그의 부하들이 더 많은 영광을 얻겠지만, 1863년 여름 펜실베이니아에 진입했을 때의 힘과 명성은 다시 얻지 못할 것이라고 썼다.[150]
반면 허먼 해터웨이와 아처 존스는 "게티즈버그 전투의 전략적 영향은… 상당히 제한적이었다"고 주장했다. 스티븐 E. 우드워스는 "게티즈버그는 동부 전선에서 결정적인 행동의 거의 불가능함만을 증명했다"고 썼다. 에드윈 코딩턴은 포토맥 군의 큰 피해를 지적하며, 전투 후 미드는 임무 달성을 위한 효과적인 수단을 가지지 못했고, 군대는 재편성이 필요했지만 1864년 3월 그랜트가 등장할 때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조셉 T. 글래터는 게티즈버그 이후에도 북버지니아 군은 여전히 강력한 세력으로 남았다고 평가했다. 에드 비어스는 리의 북부 침공은 실패했지만, 포토맥 군은 동부 전선의 전략적 교착 상태를 유지했을 뿐이라고 썼다.[151] 앨런 겔조는 게티즈버그와 빅스버그가 전쟁을 끝내지 않았고, 전쟁은 2년 더 계속될 것이라고 지적했다.[152]
피터 카마이클은 챈슬러즈빌 전투와 게티즈버그에서의 큰 손실로 리의 공세 능력이 파괴되었다고 언급하며, 이러한 누적 손실이 단일 전투의 결과가 아니었음을 암시한다. 토마스 고스는 ''Military Review''에 기고한 글에서 "결정적"의 정의를 게티즈버그에 적용하는 것에 대해 논하며, 게티즈버그 전투는 '결정적 전투'라는 칭호를 얻을 자격이 없다고 결론 내렸다.[154] 군사 역사가 존 키건도 동의하며, 게티즈버그는 전쟁에서 가장 큰 랜드마크 전투였지만, "정확히 결정적인 전투는 아니"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게티즈버그는 남군이 북버지니아를 군사적 완충 지대로 사용한 것이 끝나고 그랜트의 오버랜드 작전의 배경이 되었다.[155]
6. 2. 리 대 미드
로버트 E. 리 장군은 챈슬러즈빌 전투 승리와 게티즈버그 7월 1일 전투에서의 북군 격퇴 경험을 통해, 자신의 부하들이 무적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158] 전쟁 특파원 피터 W. 알렉산더는 리 장군이 "아마도 그의 부대가 아무리 강력한 위치라도 점령할 수 있다는 인상을 받았을 것"이라고 평가했다.[158] 리 장군 자신도 이러한 판단에 동의하며, 데이비스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의 계획을 달성하지 못한 것에 대해 군대에 비난을 돌릴 수 없으며, 대중의 불합리한 기대에 대해서도 비난해서는 안 된다. 나는 아마도 그들의 용기와 용맹을 너무 많이 기대했던 것에 대해서만 책임이 있다."라고 언급했다.[158]
전투에 대한 논란 중 하나는 리 장군의 부하들의 성과와 관련된 것이다.[159] '잃어버린 대의(Lost Cause)' 작가들을 비롯한 많은 역사가들은 리 장군의 고위 장군들이 중요한 부분에서 그를 실패하게 만들어 전투 패배를 초래했다고 주장한다. 반면, 리 장군이 부하들을 적절하게 관리하지 못하고 그들의 단점을 보완하지 못했다는 반론도 존재한다.[159] 특히, 리처드 S. 이웰과 A.P. 힐은 최근에 군단장으로 진급하여 리 장군의 지휘 스타일에 익숙하지 않았다. 리 장군은 이전 사령관 스톤월 잭슨에게 일반적인 목표와 지침을 제공했고, 잭슨은 이를 구체적인 명령으로 번역하여 사단장들에게 전달했다.[160]

조지 G. 미드 장군은 방어에 유리한 위치를 활용하고, 부하들의 결정을 존중하는 유연한 지휘를 보였다.[169] 미드 장군은 방어선을 효과적으로 배치하고, 윈필드 S. 핸콕과 같은 유능한 부하들에게 필요한 시기와 장소에서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했다. 또한, 방어 위치를 최대한 활용하고, 위협에 따라 방어 자원을 신속하게 전환하는 등 뛰어난 전술적 판단력을 보여주었다.[169] 이러한 미드 장군의 리더십은 북군이 남군의 격렬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전투 내내 위치를 지키며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리 장군은 1863년 3월 심낭염 진단을 받았으며, 현대 의사들은 그가 심장마비를 겪었을 것으로 추정한다.[166][167][168] 이러한 건강 문제는 리 장군의 판단력과 전투 수행 능력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7. 전장 보존
게티즈버그 국립묘지와 게티즈버그 국립군사공원은 미국 국립공원관리청에서 관리하는 미국의 역사적 랜드마크이다. 그러나 전장의 많은 역사적 위치가 공원 경계 밖에 있어 개발 위협에 놓여있다.[172]
최근 몇 년 동안, 게티즈버그에 카지노를 개장하려는 두 가지 제안이 대중의 압력으로 무산되었다.[173] 미국 전장 신탁은 2011년 게티즈버그 컨트리 클럽 부지 95에이커를 매입하여 미국 내무부 관리로 이전했다.[174]
미국 전장 신탁과 파트너들은 1997년부터 2023년 중반까지 40건이 넘는 거래를 통해 전장의 1242에이커를 보존했다.[175] 이 중 일부는 현재 게티즈버그 국립군사공원()에 포함되어 있다.[176] 2015년 신탁은 로버트 E. 리 장군이 본부로 사용했던 돌집이 포함된 4에이커 부지를 600만달러에 인수했다. 신탁은 부지 내 건물을 철거하고 리 장군의 본부와 부지를 복원하여 2016년 10월에 공개했다.[177]
현재에도 전투 당시를 재현하기 위해 대포 등 많은 무기가 배치되어 있으며, 안내판을 통해 상세한 설명을 제공하고 있다. 이곳은 미국 전역과 세계적으로 유명한 옛 전장 중 하나로, 여름을 중심으로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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